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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일상

큰일 하나 끝내고, 울면 한 그릇

이모티콘 24개를 모두 등록하고 나니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하루 종일 집중해서 선을 보고,
마지막 버튼을 누르는 순간까지 괜히 숨을 참았던 모양입니다.

 

기다림이 시작됐다는 사실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상태가
사람을 더 지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고민 없이 울면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평상시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 이용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복잡하지 않고,
재료도 집에 있는 것들로 충분하고,
무엇보다 뜨끈한 국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방 불을 켜고

채소를 썰었습니다.

 

배추, 양파, 당근, 버섯.
냉장고에 있던 해물과 고기도 조금 꺼냈습니다.

 

익숙한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지글거리는 익숙한 볶음 소리.

 

 

생각해 보면
이런 순간이 좋습니다.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
결과를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

 

이모티콘을 그릴 때는
선 하나, 눈 하나에도 계속 고민했는데
요리는 다릅니다.
대충 볶아도 되고,
간이 조금 달라도 괜찮습니다.

 

육수를 붓고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질 때쯤
풀어놓은 계란을 천천히 넣었습니다.
울면 특유의 걸쭉함이 생기면서
팬 안이 조금씩 완성되어 갑니다.

 

그렇게 울면 두 그릇이 나왔습니다.

 

아들과 함께 한그릇 뚝딱 해치웠습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음식도 아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딱 맞는 저녁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는
조금 긴장했고,
조금 애썼고,
이제는 내려놓아도 되는 날이니까요.

 

이모티콘 심사 결과는
내가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평소처럼 생활하는 것뿐이겠죠.

 

그래서 오늘은
울면 한 그릇으로 하루를 정리합니다.
잘 먹고,
잘 쉬고,
내일은 또 내일의 루틴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큰일 하나 끝낸 날의 저녁은

이 정도면 오늘은 잘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