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시끌벅적하게 시작되었다. 딸 내외가 오고, 딸의 반려견 '초코'까지 합류하니 집안이 꽉 찬다.
사람 다섯에 강아지 둘.
매일 썰렁했던 거실이 오늘따라 좁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느낀다. 이게 사람 사는 맛이지 싶다.
어제부터 열심히 준비한 아빠표 명절음식을 펼쳐놨다.
명절음식은 항상 같은 음식이지만 이번엔 순수 아빠표 명절음식.

모두들 맛있게 먹고 떠들고....
명절의 느낌이 진하게 느껴진다. 은퇴 시에는 은퇴 후의 명절이 과연 즐거울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실천해 나가다 보니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가족과 오랜만에 모여 맛있는 음식 먹으며 그동안 못한 이야기 꽃 피우는 게 진정한 명절이라 느낀다.
🐾 띵똥아, 너 정말 이럴 거야?
오늘의 최대 이슈는 우리 띵똥이와 초코의 만남이었다.
초코는 이제 막 꽃다운 나이의 명랑한 아가씨 강아지다.
반면 우리 띵똥이는 13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모태솔로' 어르신.
전에도 여러 번 만나 왔고 좀 친해지길 바라건만, 띵똥이는 지독하리만큼 곁을 주지 않는다.
초코가 궁금해서 다가오면 슬쩍 자리를 피하고, 냄새라도 맡을라치면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허허, 이 녀석 보게. 젊고 예쁜 아가씨를 마다하는 저 고집은 누굴 닮은 걸까.
산책을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나란히 걷는 모습 좀 찍어보려 했더니, 띵똥이는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식으로 앞만 보고 걷는다.
딸과 사위도 띵똥이의 철벽 수비에 혀를 내두르며 한바탕 웃었다. 띵똥아, 너 그러다 평생 장가 못 간다! (이미 늦었나?)


🧼 설거지 뒤에 찾아온 평화
가족들이 돌아가고 난 뒤,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매일 일 다니느라 고생한 아내를 위한 배려이자, 가장으로서의 마지막 명절 루틴이다.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까지 그릇을 닦고 나니 비로소 명절이라는 큰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지금은 방에 들어와 조명만 켜두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잔잔한 카페 음악을 틀어놓으니 여느 근사한 와인바 부럽지 않다.

🍷 와인과 치즈, 그리고 우리
노브랜드에서 사 온 치즈를 썰어 와인 한 잔을 곁들인다.
와인이 잔을 채우고, 오늘 하루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아내와 나눈다.
띵똥이의 무심함에 대해, 아이들의 앞날에 대해,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우리의 평일들에 대해.
기름진 명절 음식 뒤에 마시는 와인은 유독 깔끔하다.
조명 아래 비친 아내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편안해 보인다.
고생 많았다는 말 한마디에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밤.
시끌벅적한 낮도 좋지만, 역시 나는 이 고요하고 차분한 밤의 공기가 더 좋다.
띵똥이는 옆에서 벌써 코를 골며 잔다. 꿈속에서는 초코랑 좀 친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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