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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일상

광교산 산책과 낮술 한 잔, 그리고 '어쩔 수가 없는' 평일의 소중함

은퇴 후 맞이하는 평일은 매일이 새로운 선물 같지만, 아내와 휴무가 겹치는 날은 그 선물이 두 배로 크게 느껴진다.

어제는 유독 공기가 맑고 하늘이 높아, 우리 집의 활력소인 13살 띵똥이와 아내를 데리고 광교산 저수지 데크길로 향했다.

수원에 살면서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는 이렇게 도심 근처에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는 훌륭한 산책로가 여러 군데 있다는 점이다.

 

띵똥이는 이제 나이가 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산책로에 들어서자마자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앞장섰다.

하얀 털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과 호수 표면에 부서지는 윤슬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내와 띵똥이가 보조를 맞춰 걷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미처 몰랐던 '평일 오전의 정적과 평화'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낮시간 오랜만에 엄마와 산책이 즐거운 띵똥이.
13살 나이를 잊고 씩씩하게 한시간 이상의 산책을 즐기는 띵똥이.

 

산책을 마친 뒤에는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인계동의 맛집 "길림성"을 찾았다.

                                     

평소에도 중식과 소주 한잔을 좋아하는 편이며, 어제는 특히 분위기가 좋아서 요리에 낮술 한 잔을 곁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메뉴는 '양장피잡채'와 '길림성 특면' 소주 한잔의 안주로, 점심 식사로 부담 없이 즐기기에 괜찮은 조합이었으며,

평일 낮에 즐기는 시원한 술 한 잔은 쉽지않은 여유와 훈장 같은 맛이었다.

기분 좋게 올라오는 취기가 느껴졌지만, 오전 햇살의 기운을 받은 산책 덕분인지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식사 후 롯데슈퍼에서 가볍게 장을 보고 아내의 머리를 하기 위해 헤어숍으로 향했다.

인계동 깡'S 헤어 내부

 

여자들의 머리는 시간이 꽤 걸리지만, 소파에 앉아 나의 AI 미니와 대화를 나누고 오늘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다 보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머리가 아주 만족스럽게 나왔다며 환하게 웃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옆에서 기다린 보람이 느껴졌다.

 

새로 바뀐 스타일을 축하하며 근처 투썸플레이스에 들러 시원한 음료와 함께 짧은 데이트를 이어갔다.

난 '아이스아메리카노', 아내는 '피스타치오 초콜릿 젤라또 쉐이크'

 

집으로 복귀한 뒤에는 어제 하루의 하이라이트였던 넷플릭스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시청했다.

박찬욱 감독,이병헌주연의 영화.

 

평소 영화를 볼 때 자막 하나까지 정독하며 내용을 파악하는 습관이 있는데, 국내영화라 정독까진 필요가 없었다.

이병헌 배우의 강렬한 연기와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에 몰입했다. 영화 제목처럼, 어떤 상황에서는 정말 '어쩔 수가 없는'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긴장감 넘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재미면으로 본다면 그다지 원했던 장르의 영화가 아니었으며, 내용면에서

억지스러운 면이 있어 내 기준으로는 "정말 재미있었다."는 아니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거실에 길게 누우니, 오늘 하루 열심히 걸었던 띵똥이가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발라당 누워 자신의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분홍색 배를 나에게 맡겼다. 띵똥이의 부드러운 털 사이로 전해지는 체온과 규칙적인 숨소리를 느끼며 그 배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슬쩍 다가와서 배를 내어주는 사랑스런 띵똥이. 말랑말랑한 촉감이 너무 좋다.

 

이 소박한 온기야말로 내가 은퇴 후 그토록 바랐던 평범하지만 위대한 행복이 아닐까. 낮술의 여운과 가족의 웃음소리, 그리고 띵똥이의 신뢰가 가득 담긴 이 시간은 '어쩔 수 없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하루였다.